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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성 잔해

팔달령 장성 잔해 자연 관광지

명나라 숭정(崇禎)황제 17년(서기 1664년), 이자성은 서안에서 대순(大順)정권을 수립한 후 수십만 병사를 직접 거느리고 명나라 군사와 일전을 벌렸는데 녕무(寧武)와 대동의 전투를 거쳐서 선부(宣府)에 파죽지세로 쳐들어간 후, 연경으로부터 남하하여 팔달령을 거쳐 거용관을 쟁취한 후 북경에 직접 들어가려 했다.

이자성의 군대가 팔달령의 성 아래에 이르렀을 때 거용관은 정서백 당통(唐通), 환관 두지질(杜之秩), 순무 하겸(何謙), 총병 마대사(馬岱四)가 이미 수많은 병사를 거느리고 지키고 있었다. 이자성이 바라보니 산마루에 수많은 창과 칼이 번쩍이고 깃발들이 바람에 나붓기고 있었는데 지세 또한 매우 험준했다.

이자성은 오랫동안 생각했으나 관문을 격파할 좋은 계책을 생각해 내지 못했다. 이때 수하 병졸이 마을의 백성 하나가 이자성 장군에게 관문을 격파할 계책을 올리려 한다고 전해왔다. 이자성은 크게 기뻐하며 그 마을 사람을 불러 들였는데 이것이 이자성이 대업을 이룩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원래 팔달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석협관(石峽關)이란 곳이 있었는데 이곳만 격파하면 팔달령을 피하여 직접 거용관에 이를 수 있고 다시 머리를 돌려 팔달령을 협공할 수 있었다. 이자성은 정보를 듣고 일부분의 군사만 남겨 팔달령을 공격하는 척 하게 하고 자신은 직접 정예부대를 거느리고 석협관을 공격했다. 석협관에는 장수가 적고 병사가 부족했는바, 의군의 선봉대와 싸움이 붙자 얼마되지 않아 장성으로 퇴각하여 성을 지키는 한편 팔달령을 향해 구원을 청했다.

하늘의 뜻인가, 석협관이라는 이 조그마한 요로가 결국 한 봉건왕조의 흥망승쇄를 지켜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