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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성의 역사

중화의 땅에 있는 만리장성은 역대 각 민족의 피와 땀, 그리고 지혜가 응축되어 있다. 춘추전국시기부터 20여개의 제후국과 봉건왕조가 장성을 수축했고 이는 2천년동안 지속되었는데 전체 길이가 10000리에 이르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건축 기적 중의 하나이다.

6,7천년전, 인류는 나무위나 동굴에서 살던 곳에서 평원으로 이주하여 집거했다. 인구가 많아지면서 생산이 발전했고 야수와 홍수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부락 주변에 수로를 파고 흙으로 벽을 쌓아 씨족들의 안전을 보호했다.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위대한 장성은 바로 선사시대의 수로와 토벽으로부터 점차 발전된 것이다.

춘추·전국시대의 각국은 다른 제후국으로부터 침범을 받지 않기 위해 각자의 영토에 장성을 쌓았다. 가장 최초로 수축된 것은 초(楚)나라의 방성(方城)과 “제나라의 거방(巨防)”인데 전쟁의 확산과 더불어 위(魏)나라, 진(秦)나라, 연(燕)나라도 차례로 장성을 수축했다. 그러나 이런 장성들은 나라별로 분리되어 있었고 함께 연결되지는 않았다. “지장성(地長城)”이라고 부르는 위, 진, 연 3국의 장성은 진시황 만리장성의 기초로 되었다.

“현지에서 재료를 마련하는” 것은 장인들이 장성을 수축하는 과정에서 축적한 귀중한 경험이다. 장거리 운수를 피하고 인력, 물력, 재력을 절약하기 위해, 서로 다른 지리조건에서 다양한 건축재료를 사용했는데, 이를테면 모래와 자갈이 많은 곳은 모래와 자갈로 쌓아올리고 황토고원 지역에서는 황토로 쌓아올렸다.

서기 전 221년, 진시황이 6국을 통일하고 제후국이 할거하던 혼란한 국면을 종결지어 통일된 봉건왕조를 세웠다. 진시황은 중원지역의 안정을 확보하고 북방 흉노의 위협과 교란을 피하기 위해 몽념(蒙恬) 대장군을 파견하여 흉노를 몰아냄과 동시에 큰 인력, 물력, 재력을 동원하여 장성을 수축했다. 연(燕), 조(趙), 진(秦) 3국은 북방의 장성을 기초로 많은 부분을 확충하면서 서쪽은 임조(臨洮)에서 시작하고 동쪽은 요동(遼東)까지 만여리를 뻗어나간 장성을 수축했는데 이것으로부터 세계적에서 가장 웅장한 고대 건축공정이 중국 북부에 우뚝 솟게 되었다.

중국의 진(秦), 한(漢), 금(金), 명(明) 등 4개 왕조에 걸쳐 수축되었던 장성은 모두 1만리를 초과했는데 그중 한대의 장성이 가장 길다. 한대의 장성은 동쪽의 요동에서 시작하여 서쪽은 염택까지 이르렀으며 길이는 2만여리에 달한다. 진시황은 재위기간 동안에 도량형을 통일했는데 철권(鐵權)은 오늘의 저울추에 해당하다.

감숙성 옥문관은 황토가 부족한 사막지대이다. 이곳의 장성은 갈대와 모래자갈을 번갈아 쌓아서 수축했다. 갈대와 모래자갈 중에 소금과 알칼리 성분이 포함되어 있어 소금과 알칼리가 분해 응고 되면서 튼튼한 벽체가 완성되었고 지금까지 2천년의 모래바람을 겪어왔으나 끄덕없이 버티고 있다.

“일편석관(一片石關)”은 하북성 부녕과 요녕성의 수중이 인접한 지대에 있는데 9개의 문이 있다고 하여 “구문구(九門口)”라고 부른다. “일편석관”은 장성을 수축할 때 수로를 통과하는 지역의 홍수방지를 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경동의 첫 관문”이라고 부른다. 왼쪽은 천하의 첫 관문인 “산해관”이고, 당신 뒤에 있는 것은 감숙성의 가욕관으로 명(明)대 장성의 가장 서쪽이고 이곳은 산서성 대현(代顯)의 안문관(雁門關)이다.

북위(北魏), 북제(北齊), 동위(東魏), 북주(北周) 왕조도 장성을 수축했는데 이는 장성이 여러 민족들의 노동의 결정체임을 다시 한번 설명해 주고 있다. 수나라(隨) 때 6차례 에 걸쳐 대규모로 장성을 수축했고 당나라 때는 국력이 강성하여 장성을 수축하지 않았다. 송(宋)나라는 장성을 수축하여 요(遼)나라와 서하(西夏)의 공격을 막았다. 금(金)나라의 장성은 소수민족이 중앙집권을 수립하고 수축한 장성 중에 가장 긴 장성으로 그 길이는 5,000리며 참호가 유명하다. 원(元)나라 때는 장성을 수축하지 않았다.

명나라가 세워진 후, 원(元)나라의 복벽 및 다따르, 와라, 여진, 토번 등의 민족 교란을 방지하고자 끊임없이 장성을 수축했고, 또한 외국의 침입에 대항하여 동남 연해지역에서 장성을 연장했다. 명나라는 장성이 많기로 여러 왕조 중에서 으뜸을 차지하고 있다. 주로 압록강변의 구련성(九連城)으로부터 감숙의 가욕관(嘉峪關)까지 이르렀는데 전장은 1만 5천여리이다. 북경과 산서성의 편관(偏關)사이에서 남북의 두개 장성으로 나뉘어 졌다. 많은 지역에서 장성은 주성벽의 대변(大邊)을 제외하고 이변(二邊), 삼변(三邊), 외변(外邊), 내변(內邊), 호변(護邊) 등 여러층의 성벽을 갖고 있다. 이를테면 안문관 밖에는 3층의 대석벽,  23층의 소석벽을 갖고 있다. 그중 산해관으로부터 가욕관에 이르는 1만 2천 7백리의 장성이 훌륭하게 보존되어 있는데 특히 산해관으로부터 북경주변에 이르는 구간은 척계광이 직접 감독하면서 수축한 장성이 가장 장관이다.

청나라 초기 요녕성, 길림성 사이에 유명한 성경장성(유조변)을 수축했는데 총길이는 2,600리이이다. 산해관, 거용관, 안문관, 가욕관 등의 요충지와 장성의 일부 구간도 수선했으나 청조 중기 이후에는 더 이상 수축하지 않았다.

긴 세월과 인위적인 파괴를 입은 장성은 현재 매우 흩어져 버리게 되었는데 특히 명나라 장성도 많이 훼손되었다. 그러나 총길이가 십여 만리에 달하는 중화의 거룡은 여전히 인류의 고대역사에서 가장 장관인 공정이다.시대와 지점별로 험준한 지세를 이용하여 요충지를 설치한 장성은 그 자태가 다양하여 건축 예술의 재능을 보여주고 있다. 장성 안팎의 여러 민족들은 오랜 세월의 왕래를 거쳐 인위적인 분할과 장애를 벗어나 통일되고 화목한 중화민족의 대가족이 되었다. 장성은 위대한 고대 문명국의 상징으로 중화민족의 긍지일뿐만 아니라 세계 각 지역 국민들이 보려고 선망하는 곳으로 여러 나라 국민들의 우정을 다지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