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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달령 장성의

팔달령은 북경 서북쪽으로 60킬로미터 떨어진, 동경116°65’, 북위 40°25’에 위치하고 있다. 팔달령은 군도산(軍都山) 중에 있는 하나의 산 입구인데 명나라의 《장안객화(장안객화)》는 “길이 이곳에서 나누어 지고, 사통팔달하여 팔달령이라고 부르고 관산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팔달령이란 이름은 금(金)나라 시인 유영(劉迎)의 시, 《저녁에 팔달령 아래에 이르니(晩到八達嶺下, 達旦乃上)》와 《팔달령을 벗어나(出八達嶺)》에 처음으로 나타났다. 원(元)대에 이르러 이곳은 북구(北口)으로 불리웠는데 이는 남구(南口)와 상응하여 부른 것이다. 남구는 북경의 북쪽 교외 창평 현 내에 있고 남구로부터 북구에 이르는 도중에 40여리의 협곡이 있는데 협곡에는 장성에서 유명한 요로인 “거용관(居庸關)”이 있어 “관구(關溝)”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팔달령은 관구의 북쪽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우뚝 솟은 봉우리 사이로 수로가 있으며 형세는 매우 험준한다. 팔달령에서 거용관을 굽어보면 다른 세상을 훔쳐보는 듯하여 옛사람들은 “거용관의 험준함은 관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팔달령에 있다.”고 말한다. 팔달령 산어귀는 그 지세가 특수하여 역대 장수들의 쟁탈지가 되었으며 항상 많은 병사들을 파견하여 지키게 했다. 팔달령이 군사전략 요충지가 된 것은 춘추전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사기(史記)》의 기재와 문물 전문가들의 조사 결과는 모두 팔달령 일대에 전국시대의 장성이 건축되어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벽체의 잔해와 돈대의 유지, 그의 주향은 명나라의 장성과 대체적으로 일치하고 있다. 한(漢)나라 역사에는 이곳에 군도(軍都)와 거용(居庸), 두 개의 관성을 설치했었다고 기재되었다. 북위(北魏)의 《수경주(水經注)》에는 “거용관이란 이름은 거용계에 위치하여 얻게 된 것이다. 남쪽은 막다른 곳으로 돌을 쌓아 관문을 만들었다. 산이 험준하여 경공을 아는 자도 오를 수 없다. 물은 남쪽으로 흐르는데 군도계를 경과한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 때문에 한나라 때 거용관을 수축했고 그 소재지는 팔달령이었다고 전문가들은 인정한다. “거용(居庸)”이란 이름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진시황이 장성을 수축할 때 남쪽에서 가난한 농민과 죄수들을 끌어다 군도산의 규천(妫川)분지에 정착시키고 용도(庸徒)들의 거주지라고 불렀다. 한무제 때 규천에 거용현(오늘의 연경)을 설치했는데 《수경주》에 기재된 지형, 지모와 산수의 흐름이 오늘의 팔달령의 지리환경과 일치하고 있다.

1500년 전, 북위(北魏) 시기 팔달령 일대에 장성을 수축했다. 《위서세조본기(魏書世祖本紀)》 기재에 따르면 북위의 척발씨(拓跋氏) 태평진군(太平眞君) 7년(446년)에 국도 평성(오늘의 대동)이북에 장성을 수축하고 “기상새위(畿上塞圍)”라고 불렀다. “기상새위”는 동쪽의 군도산(즉 팔달령 일대)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는 황하에 이른다. 북제(北齊)왕조 천보(天保) 6년(555년)에 또 다시 장성을 수축했는데 서쪽은 대동에서 시작하여 군도산을 거쳐서 동쪽으로 가면서 장성을 해변까지 연장시켰다.

팔달령 장성은 명조때 새로 수축되었다.

성벽의 군사상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명태조 주원장(朱元章)은 황제가 된 이후 서달(徐達), 풍승(馮勝) 대장군을 파견하여 북방에 관문을 세우고 요충지를 설치했으며 장성을 쌓고 병사를 훈련시키고 황무지를 개간하도록 하여 원(元)나라의 잔여 세력이 남쪽으로 내려오는 것을 방어했다.

1403년, 명나라의 세번째 황제인 주체(朱棣)가 즉위했다. 1420년, 주체는 도성을 남경에서 북경으로 옮겼다. 중국을 통일하려고 결심한 주체는 5차에 걸쳐 직접 출정했는데 몽골 깊숙이 들어갔고 가장 멀리는 현재 러시아에 있는 오논강 부근까지 이르렀다. 1488년 이후부터 대규모 장성 수축공사를 벌렸고 270년간 18차례에 걸친 대규모 공사를 거쳐 드디여 높은 성벽을 완성했는데 동쪽의 요녕성 압록강변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는 감숙성 가욕관 서쪽의 부룽지까지 이르렀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까지 남겨져 내려온 장성이다. 명나라 장성은 전장이 14600리, 북방의 7개성, 시, 자치구를 통과한다. 공정기술 수준이나 방어시설 설치의 정도는 모두 그에 앞서 있던 장성들이 비교 할 수 없는 수준이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보면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만리장성은 춘추전국시대에 처음 수축하기 시작하여 진시황 시기에 연결되었으며 명 왕조 때 완성된 것이다.

명나라의 만리장성은 더이상 단순한 높은 성벽이 아니라 “층마다 방어시설을 설치” 한 방어체계로 되었다. 중점지역에는 여러겹으로 된 성벽, 요충지를 구축했으며 녕하, 섬서, 산서, 하북 등의 지역에서는 모두 장성의 복선을 설치했다. 산서성에 설치된 장성의 복선만 해도 4개나 되는데 중요한 교통군사 요지마다 여러 개의 관성과 짧은 성벽을 수축했다. 이를테면 안문관의 10리에 이르는 산골짜기에는 28겹의 석벽이 있는데 그야말로 “1치의 땅에도 장애물을 설치하고 이르는 곳마다 진을 설치했다.”고 할 수 있다.

팔달령은 수 많은 중대한 역사 사건의 증인이다. 첫번째 황제 진시황은 동쪽의 갈석에 이른 후 팔달령에서 대동을 경유하여 함양으로 돌아왔고, 소태후의 순행, 원태조가 산해관을 넘은 사실, 원나라 황제가 매년 두차례 북경과 상도 사이를 오고 갔고, 명나라 제왕의 북벌, 청나라 천자의 친정 등, 팔달령은 모두 반드시 거쳐야 할 길목이었다. 역대의 황족, 선비들이 팔달령을 읊은 시는 더욱 부지기수이다. 가장 일찍이 시를 남긴 시인은 당나라의 시인 고적(高適)인데 그의 시는 “물은 가파른 산비탈을 따라서 흐르고 뭇산은 구름과 높이를 같이 하고 있다.” 라고 읊고 있다. 팔달령은 민족의 분쟁과 피비린내 나는 전투, 하나하나의 역사적 사건들을 증명하고 있다. 오늘날, 고난의 세월, 2천년의 제후들의 쟁탈, 봉건왕조의 교체는 이미 머나먼 과거가 되었고 시대는 팔달령 장성에 새로운 사명을 부여했다. 팔달령은 역사의 기념비처럼 뭇산 속에 우뚝 솟아 중화민족의 문명과 지혜를 발산하고 있으며 중화민족의 불굴의 위대한 품성과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팔달령은 중국의 여러 민족, 해외교포, 그리고 세계의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는 다리이자 인류의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된 후 1952년, 곽말약(郭沫若) 국무원 부총리겸 문화교육위원회 주임이 팔달령 장성을 수건하고 국내외 관광객을 받아들일 것을 제기했다.

청나라 이후, 팔달령 장성은 점차 황폐해졌다. 관성 서쪽의 “북문쇄약(北門鎖钥)”는 이미 절반이상이 훼손 되었고 동쪽에 있는 “거용외진”의 돈대도 금방 허물어질듯 했고 장성 성벽의, 보루, 테라스, 망루 등도 허물어져 버렸다. 국무원이 원상 복구 결정을 내린 후 관련 부서는 즉시 작업을 시작하고 여러 차례 수선을 진행했다.

1961년 국무원은 팔달령 관성과 성벽을 전국 중점 문물보호단위로 확정했다. 1984년 등소평 주석의 “중화를 사랑하고 장성을 수건하자.”는 제창하에 유구한 역사를 지닌 관성은 새로운 모습을 보였다. 차례로 19개의 망루를 복구하고 벽체의 전장은 3741미터가 되어, 관광지 총면적이 1만 9천 제곱미터까지 이르렀다. 1986년, 팔달령은 북경 16경의 하나로 선정되었고 1987년, 유엔은 만리장성의 “세계문화유산” 신청을 접수했고 1991년 8월, 팔달령은 만리장성의 정화의 자격으로 북경고궁박물관에서 유네스코가 발급한 인류문화유산 증서를 받았다. 1991년 12월, 주해에서 열린 중국관광 40대 명소 선정대회(94개 관광명소가 후보로 참가했고 회수한 유효 투표수는 48만장)에서 팔달령은 37만장의 절대다수 표로 전국 40대 관광명소의 맨 앞자리를 차지했다.

팔달령 장성은 국내외에서 이름을 날렸고 만리장성이 최초로 개방된 지역이다. “장성에 오르지 않으면 사내 대장부가 아니다.”는 말이 있다. 지금까지 팔달령은 1억 3천 만명의 국내외 관광객들을 맞이했고 차례로 닉슨, 레이건, 처칠, 고르바초프, 엘리자베스 여왕 2세, 히스 등 372명의 외국 수뇌와 수 많은 세계 유명인사들이 팔달령에 올랐다. 이와 같은 경우는 세계적 명소 중에서도 흔치 않은 것이다. 팔달령은 장성의 방문자들에게 깊은 인상과 오랜 여운을 남겨주었다.

만리장성의 정수 부분인 팔달령 장성은 옛스러우나 생기발랄한 자태로 세계의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으며 장성에 올랐던 이들 중에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다.